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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체제 정비와 진흥왕의 영토 확장”'경북대 이영호교수' 진흥왕의 정치와 국내외 정세 강의

[국제i저널 = 경북 여 홍, 이보슬 기자] 경상북도는 신라사대계 대중화를 위해 9월 19일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수도권대상 신라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재강좌를 개최했다.

이날 강의는 경북대 이영호 교수는 “체제정비와 진흥와의 영토확장”이라는 주제로 역사학적 관점에서 2시간 동안 진행했다.

<정치 체제의 정비>

지증왕대는 德業日新 網羅四方라는 문증이 있으며 국호를 ‘新羅’로 확정하고, 법흥왕은 병부, 사정부 설치, 율령의 반포, 상대등의 설치, 불교 공인했으며, 진흥왕대는 품주 설치와 화랑도를 설치했다.

<진흥왕의 영토 확장>
한국 고대국가에 있어서 영토는 ‘왕토(王土)’라는 관념이고 진흥대왕대의 비석(적성비, 순수비, 감악산비) 고대 영토의식의 반영이고 영토의식의 주체는 국왕이다.

가. 단양적성비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면 하방리의 적성에서 발견 (국보 198호).
내용은 신라가 고구려 지역이었던 적성(赤城)을 공략하고 난 후 그들을 도와 공을 세웠던 적성 출신의 야이차(也尒次)와 그와 일정한 관계에 있던 인물들을 포상하고 나아가 적성지방민들을 위무(慰撫)할 목적에서 세운 비로 추측.

나. 창녕비
창녕군 창녕읍 교상동 만옥정 공원 안에 있다. 원래는 화왕산에서 뻗어내린 목마산 서쪽 언덕에 있었다고 한다.

비석은 신사년(辛巳年) 2월 1일 건립되었는데, 신사년은 561년(진흥왕 22)으로 추정된다. 진흥왕의 4비 가운데 창녕비를 제외한 3비에는 서두에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표현이 있어서 순수비로 보나, 이 비석에는 이러한 표현이 없다.

다. 북한산비
경기도 고양시 은평면 구기리 비봉(碑峰)에 있었는데,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국보 제3호이다. 정확한 연대를 알려주는 간지가 없어 분명히 하기는 어렵지만, 비문 중의 ‘남천군주(南川軍主)’가 하나의 단서가 된다. 비석의 석재는 경주 지역에서 산출되는 돌과 가장 가깝다고 한다.

라. 황초령비. 마운령비
황초령비는 함경남도 함흥군 하기천면 황초령에 있었는데, 조선 철종 3년(1852)에 관찰사 윤정현(尹定鉉)이 영(嶺) 아래의 중령진(中嶺鎭)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비는 상부의 일부와 좌측부의 상부가 깨어져 나가고, 제2석과 제3석을 접합한 부분은 글자가 보이지 않아 판독에 많은 애로점이 있다. 다만 같은 해에 만들어진 마운령비의 비문과 기본적으로 구조가 동일하고 왕을 수행한 인물이 거의 일치하고 있어서, 보이지 않는 글자의 상당수를 추정 복원할 수 있다.

마운령비는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사동 만덕산 복흥사의 배후에 솟아 있는 운시산(雲施山, 운무산)의 산꼭대기에 세워졌다고 전하며, 그 후 복흥사(福興寺) 위 부락 모퉁이의 약간 평탄한 곳에 옮겨 별도의 비좌(碑座)를 만들어 세워 두었다.

마. 감악산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객현리 산 182번지에 위치하고 1982년 발견됐고 기단부, 비신, 개석 있고 몰자비(沒字碑)이고,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의 형태와 유사하다.

4. 태왕의 나라, 신라
‘法興大王’의 칭호 울주 천전리서석에 있고 ‘眞興太王’의 칭호는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에 있다. 진흥왕은 중국의 천자와 같이 관할 영토를 순수하고 돌에 기록했고 순수의 이유는 유교적 왕도정치의 표방했다.

여홍, 이보슬 기자  yeu30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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