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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김유신, 김춘추의 야망과 이상삼국통일을 이룬 제일가는 원훈으로 길이 표상
  • 여홍, 송지환, 이보슬 기자
  • 승인 2017.12.0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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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i저널 = 경북 여홍, 송지환, 이보슬 기자] 경상북도는 신라사대계 대중화를 위해 지난 9일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수도권대상 신라천년의 역사와 문화 시민강좌을 개최했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과 한국고대사학회가 공동주최하고 한성백제박물관이 후원한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16강 ‘김유신 김춘추의 야망과 이상’의 주제로 경북대 주보돈 교수가 시민강좌를 2시간 동안 진행했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비슷한 시기에 오래도록 함께 활동한 인물로 서로 다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죽을 때 같은 길을 걸어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영원한 동지었다.

태생적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맹활약의 새로운 모습의 신라사회를 힘차게 열어간 시대의 거인 이였다.

김유신의 가계도는 김해에 위치란 금관국 왕족의 후예로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금관국 10대 구형왕의 계화(桂花)라는 부인과의 사이에 노종(奴宗, 혹은 世宗이라고도 표기함), 무덕(武德), 무력(武力)의 세 아들이 있었다.

무력은 김유신의 할아버지 로 최전선 한강유역 영토를 책임진 최고지휘관군수 자리에 올라 진흥왕 일대를 통해 영역 확인을 도모하고 여러 전투에 앞장서서 최고의 수훈을 세웠다.

김유신의 아버지는 김서현으로 최후 관등은 소판으로서 당시 대양주도독을 역임하고, 김서현과 만명부인 사이에 태어난 김유신은 세 되던 해 화랑으로 선발되어, 611년 (진평왕33년) 화랑으로서 고구려, 백제 병합의 웅지를 품고 홀로 중악(中嶽)의 석굴에 들어가 심신을 단련 하였다.

김유신은 629년 당시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낙비성을 함락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642년에는 백제벽력이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대야성 및 군사적 거점인 40여성을 장악 했다.

647년1월 상대등 비담이 왕위계승를 위해 난을 일으켜 그 난을 진압하면서 김춘추와 함께 권력을 장악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모두 진골귀족으로 최고의 신분에 속하지만 전통적 귀족으로부터 차별당하는 처지로 권력의 중추에 나서면서 유학 지배이데올로기 실현을 내세워 당나라 제도를 모방한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를 수용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김춘추는 654년 마침내 왕위에 올랐지만 반대세력, 안팎의 정치 불안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수단으로 전쟁이 동원되었다.

659년(태종무열왕6년) 신라는 백제가 변경을 계속 침범 해오자 최후의 전면전을 추진하여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를 공격을 시작으로 신라는 5만 병력을 동원해 백제 총공격 하여 660년에 백제을 멸망시켰다.

당은 백제가 멸망하자 당은 신라까지도 기미주(羈?州))로 삼아 영향력을 행사 하려했다.

신라는 당이 자신들의 입장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668년 당군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망 시켰다

김유신은 전쟁에서 세운 공로로 신라에서 가장 높은 별정의 관등인 태대서발한과 5백호의 식읍을 포상 받았다.
태대서발한은 대대각간의 이칭으로서 신라가 멸망하기 까지 설정한 최고의 관등이었다.

김유신은 나당전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인 673년 풍병을 앓다가 사망했다.
통일이후 신라는 지배체제 유지를 위해 일통삼한론을 내세워 통합의 당위성을 강조 하였다.

그때 통합의 원훈으로서 무열왕, 혹은 문무왕을 내세울 때 반드시 유신을 포함시킨 것은 그가 신라의 삼국 통합에 어떤 영향을 끼쳤던 것인지를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그의 공훈은 오래도록 신라인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김유신 사망 후 세월이 흐를수록 중대에 점차 왕족 중심의 지재체제가 확립되어 김유신의 후예들은 점점 핵심에서 밀려나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여홍, 송지환, 이보슬 기자  iij@ii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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