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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김헌창, 장보고의 야망과 좌절신라 하대 사회의 지방세력의 성장과 선구적 존재 해상왕 장보고
  • 여홍, 송지환, 이보슬 기자
  • 승인 2017.12.06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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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i저널 = 경북 여 홍, 송지환, 이보슬 기자] 경상북도는 신라사대계 대중화를 위해 지난 11월 14일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수도권 대상 신라사 연재 강좌를 개최했다.

이날 강의는 동국대학교 윤선태 교수의 ‘김헌창, 장보고의 야망과 이상’이라는 주제로 역사학적 관점에서 사서의 논거를 제시하며 2시간 진행했다.

신라 하대 사회와 김헌창의 반란는 김헌창 자신의 아버지인 김주원이 왕위다툼에서 패하여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중대의 마지막 왕인 혜공왕(765~780)은 왕권에 대한 진골들의 끝없는 도전을 제어할 수 없었고, 결국 김지정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핑계로 군사를 일으킨 상대등 김양상과 이찬(伊湌) 김경신에 의해 피살된다. 이후 왕위는 김양상에게 넘어가니, 그가 바로 선덕왕(宣德王)이다. 이로써 태종 무열왕 직계의 중대왕실은 끝이 나고 하대가 시작된다.

김헌창의 난은 중앙귀족 내부의 왕위계승 분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김헌창이 ‘장안(長安)’이라는 새로운 국호를 제정하였던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신라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성격이 짙었다. 또 이 난에 연좌되어 죽임을 당한 김헌창의 ‘종족(宗族)’과 ‘당여(黨與)’가 무려 239인이나 될 정도로 하대 진골귀족의 분열과 자기항쟁은 매우 격렬했다.

특히 김헌창의 난은 충청·전라 등 구백제 권역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지방세력이 난에 참여하였다. 이 지역에 파견된 진골출신의 도독(都督)·사신(仕臣) 등은 물론 하위의 지방관들과 상당수의 이 지역 지방인들이 김헌창의 난에 가담하였다.
그 이전에도 신라 국가에 반기를 든 반란은 있었지만, 모두 중앙에서 일어나 진골귀족 간의 무력적 충돌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김헌창 난에는 광범위하게 지방세력, 특히 구백제 권역의 지방인들이 참여하였다.

지방세력의 성장과 ‘해상왕’ 장보고

장보고는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들을 소탕한 후 서·남해의 해상교통을 지배하여 중국 및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경제력과 무력을 바탕으로 신라의 왕위계승에도 관여한 당대 최고의 지방 세력가였다.

장보고는 왕의 승인을 받고 지방민을 규합해 1만여 명의 군대를 양성하여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 한다. 그에게 내려진 ‘대사(大使)’라는 벼슬은 신라의 기존 관직 체계에는 없는 특별한 직함이었다.

청해진은 건설 당초부터 장보고의 개인적 역량에 기초한 독자적인 세력의 성격을 띠었다. 이후 급속히 장보고의 세력이 성장한 데에는 골품제에 구애되지 않는 장보고의 인적 네트워크 창출이 큰 몫을 했다. 장보고는 과도한 세금수탈로 내몰린 빈민들을 보듬어주었고, 진골에게 천대받던 지방출신의 인재들을 포용했다.

또 8세기 이래로 황해연안에서 왕성했던 신라인의 해상 활동 능력을 적극 활용해 이 지역 세력들을 묶고 조직화했다. 결국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하고 동중국해 일대의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여, 미국의 저명한 동양사가 라이샤워의 말처럼 ‘해상왕’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일본의 관리가 장보고에게 서신을 보내 일본의 사신단과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과 귀국 여정을 도와줄 것을 탄원했던 점은 당시 일본과 당을 잇는 해상교통로에서 그의 위세가 얼마나 컸던가를 여실히 증명한다.

장보고는 당나라 산둥반도의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법화원(法華院)을 건립하고 연간 500석을 추수하는 토지를 보시하였다.
이 법화원은 상주하는 승려만 30여 명이며, 이 지역 신라인들의 정신적인 귀의처로서 법회 때에는 신라말을 사용하였고, 한꺼번에 250여 명이나 참석했다.

그러나 장보고세력은 이후 신라의 왕권에 대항할 정도로 중앙귀족과는 별도의 독립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진골귀족 하의 사병조직과는 다른 일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장보고세력에서 주목되는 점은 하대에 들어와 지방사회가 과거 중앙에 예속된 존재에서 이제는 신라 중앙의 권력재편에도 개입할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1등공신인 장보고는 이제 오히려 그의 막강한 힘 때문에 중앙정부에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결국 장보고는 841년 중앙에서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암살되었고, 청해진의 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여홍, 송지환, 이보슬 기자  iij@ii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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