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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동아시아 국제전과 신라의 통일”철기술 발전으로 국가조직력 강화 병력 대규모화

[국제i저널 = 경북 여 홍, 이보슬 기자] 경상북도는 신라사대계 대중화를 위해 지난 9월21일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수도권대상 지금의 ‘동아시아 국제전과 신라의 통일’이라는 주제로 강좌를 개최했다.

이날 강의는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이고 한국사연구회, 한국고대사학회 회장을 역임한 노태돈 교수가 역사학적 관점에서 논거를 제시하며 2시간 동안 진행했다.

1. 삼국통일전쟁의 동인
삼국통일 시대에 야철기술이 발전하면서 철제 농기구의 보급 확대되어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촌락공동체 해체되었다.
삼국이 영역국가로 발전 관료조직의 확충되고 국가의 조직력을 강화하여 보다 많은 영토와 인민을 획득하기 위한 귀족들의 이해관계와 일치해 병력을 대규모화 해 전쟁이 지속되어 삼국 간의 군국적 분위기가 이어졌다.
고구려는 5~6세기에 유지되었던 다원적인 세력균형상태(복수의 나라들 간의 힘의 균형을 이루는 상태)를 유지하려 했다.
한반도 내에서 진행된 삼국 간 갈등의 물결과 고구려와 당 간의 대결의 파도가 결합함에 따라 통일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2. 전쟁의 발발 : 645년의 전쟁
640년 당나라가 고창국(신강성 투르판)을 정복하고 641년 고구려에 사신 파견, 침공의지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고구려 상하에 위기의식 고조되어 당에 대한 방어전략을 두고 귀족들 간에 강·온파의 대립 격화됐다.
642년 7월 백제가 신라를 공격, 30여 성 공략 10월 평양에서 유혈 정변 벌어지고 연개소문 집권했고 642년 연말 신라의 김춘추 평양 방문하고 연개소문과 담판했지만 평화 협상 결렬됐다.
643년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압박하여 신라가 당에 구원 요청하고 645년 당군의 고구려 침공으로 초반전 당군이 우세했지만 고구려의 반격으로 안시성 부근에서 대회전 양측이 각기 15만 동원됐다.
고구려군은 중장기병 중심의 전술 돌격했고 당군의 장창보병대에 의해 저지 이어 당군의 경장기병 중심의 전술에 의해 포위되어 대패했다.
안시성 수성전(守城戰)은 요동 평야에서 평양성으로 가는 진격로의 길목에 위치해 당군의 공격을 3개월 이상 저지하고 고구려군 전열정비 당군을 포위 추위가 오고 몽고고원의 유목민 집단인 설연타와 동맹 체결하여 당의 본부를 위협 당군의 전면 퇴각했다.
요동에서 고구려와 당의 전투가 치열할 때, 신라군의 북진 이어 백제군의 동진. 신라군의 퇴각했다.
왜국에서 정변(大化改新)이 일어남, 체제정비와 기존 정책(對唐政策, 친백제 위주의 기존 對韓半島政策 등)에 대한 재검토 움직이 있었다.

3. 전후의 각국 동향 : 합종과 연횡
당나라는 설연타 타멸되고 고구려에 대한 장기 소모전 전개되고 고구려 남부에 제2전선 구축 도모하고 신라에 주목했다.
고구려는 강거(康居)국과 동맹 모색하고 우즈베키스탄 사마르탄트시 교외의 아프라시 앞 궁전 벽화에 2명의 조우관을 쓴 고구려 사신이 보인다.
신라는 김춘추 647년 왜국 방문 협상하고 별 성과 없이 648년 당나라 방문, 신라·당 동맹 체결하고 이후 신라는 왜국과 당의 관계 개선을 도와주며 왜국을 신라·당 편에 끌어드리려 시도했다.
왜국은 정세를 관망하며 기존 친백제 노선 견지하고 신라·당 동맹이 의미하는 중대성을 파악치 못함. 정세 파악에 어두웠다.
백제는 왜국과 고구려와의 우호 관계 유지에 주력하고 정보력과 상상력의 부족으로 당군의 바다를 통한 침공 가능성을 예상치 못했다.

4. 660년 백제 멸망과 부흥운동
백제 멸망 직후부터 부흥운동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왜국은 부흥운동군에 물질적 군사적 지원. 4만 2천의 왜군이 한반도에 참전했다.
백강구(白江口; 白村江) 전투와 주류성 공략전에서 패배, 부흥운동 종식, 다수의 백제 귀족 등이 일본으로 망명했다.
백강구 전투 이후, 왜국은 신라·당 동맹군의 일본열도 침공 가능성을 크게 우려하여 조선식 산성을 각지에 쌓는 등 방어책 마련에 골몰했다.
당이 백제 영토 차지하고 신라의 몫은없고 신라는 오히려 당군의 침공 가능성을 우려하여 고구려가 존속하는 한 신라의 안보는 보장됐다.

5. 668년 고구려의 최후
백제의 멸망으로 고구려의 전략적 위치 크게 악화 남북에서 적을 맞게되고 침략군은 겨울철 작전도 가능해 젔고 연개소문 사망 이후 그 자식들 간의 내분으로 큰 아들은 당에 투항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로 투항 지배층의 내분과 배신 분열로 고구려인의 저항의지는 꺾였고 투항 항복이 이어졌다.


6. 신라·당 전쟁과 신라·일본 관계
668년 9월 평양성 함락 직전에 신라사신이 왜국에 도착. 양국 간의 협상이 진전. 양국 국교 재개되고 669년 봄, 신라군의 당군에 대한 공격 시작 신라로서는 세계 제일의 강대국인 당과 결전을 벌이기 위해 배후의 왜국과 우호관계 확립을 시도했다.
일본은 신라·당 전쟁으로 안보의 위협과 패전국 지위에서 벗어나 국제적 지위 향상. 내정 개혁에 주력, 중앙집권적인 천황제 국가 건설하고 신라·당 전쟁의 추이는 신라일본 관계에 영향. 당과 신라 간의 전쟁이 장기화하자, 일본은 점차 신라에 대해 일본의 우월적 지위에 승복할 것을 강요. 당과의 전쟁 중인 신라는 이에 수동적으로 응했다.
676년 당과의 전쟁 종결 이후에도 신라는 당과 이면적 대립 지속하고 당은 고구려와 백제의 왕손을 각각 고려 조선군왕 백제 대방군왕으로 봉해 수도에 유거(幽居)시키고 때가 되면 재차 한반도로의 침공을 노렸다.
7세기 말 발해가 건국. 8세기에 들어 신라와 당의 화해. 이어 733년 당과 신라가 동맹을 맺어 발해를 공격. 신라의 전략적 지위 개선. 이에 일본과의 기존 관계에 반발, 양국 간의 대립과 마찰. 상대 국가의 외교 사절의 접견 거부했다.
755년 당에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고 일본 조정이 발해와 동맹을 맺어 신라를 정벌하려는 계획 추진하여 실패하고 신라와 일본, 외교 단절 이후 신라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을 대외 정책의 기본으로 삼음. 고려 조선으로 이어졌다.

여홍, 이보슬 기자  yeu30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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