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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골품제 하의 정치와 일상생활’골품의 확립과 성격 통일 전후 관료제 운영
  • 여홍, 송지환, 이보슬 기자
  • 승인 2017.10.30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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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i저널 = 경북 여 홍, 송지환, 이보슬 기자] 경상북도는 신라사대계 대중화를 위해 지난 9월 26일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수도권 대상 신라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재강좌를 개최했다.

이날 강의는 단국대 전덕재 교수는 “골품제 하의 정치와 일상생활”이라는 주제로 역사학적 관점에서 2시간 동안 진행했다.


[골품제의 확립과 성격, 그리고 변화]

6세기 초반에 김씨와 박씨 왕족을 중심으로 진골신분을 형성하였고, 옛 6부의 지배층을 두품신분으로 설정하였다.

진덕여왕대에 최종적으로 왕경 6부의 지배층을 6두품, 5두품, 4두품, 3두품, 2두품, 1두품의 신분으로 편성했다.

일반적으로 신분보다 관등의 고하가 관료제 운영에서 중요하게 고려되면, 국왕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된다.

신라에서는 왕경 6부인에게 경위(京位: 이벌찬, 이찬을 비롯한 17관등), 지방 출신의 지배자에세는 외위(外位: 악간·술간·고간·귀간·선간·상간·간·일벌·일척·피일·아척 등)를 수여하여 차별하였음.

문무왕 14년(674)에 외위를 폐지하고 경위로 관등을 통일. 경위와 외위의 2원적 관등제운영을 통하여 6부인을 우대하던 제도의 철폐했다.

본래 6두품에는 주로 왕경 6부의 재배층 가운데 간군(찬군) 이상의 관등에 승진할 수 있는 가문의 사람들이 편제되고 통일 이후에 고구려와 백제 유민 가운데 일부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귀화한 사람, 지방민 가운데 커다란 공을 세운 사람, 진골과 6두품 사이에서 출생한 사람들도 6두품에 편제되면서 그 숫자가 크게 늘어났고, 5, 4두품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라 진골과 6두품 이하는 귀속 신분으로서의 성격을 여전히 지니면서도 점차 후천적으로 획득 가능한 신분으로서의 면모도 지니게 됐다.

종래에 득난을 6두품의 별칭으로 보았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 하대에 이르러 진골과 6두품 사이에 출생한 6두품 신분의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얻기 어려운 귀성(貴姓)인 김씨와 박씨 성을 얻은 신분이라는 의미를 지닌 득난(得難)이라고 자처한 것으로 확인됐다.

하대에 이르러 진골과 혈연적으로 연결된 김씨와 박씨의 6두품 신분이 득난을 자처하면서 진골과 더불어 이들의 관리 진출이 두드러졌고, 김씨와 박씨 이외의 6두품과 5, 4두품의 관리 진출이 크게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이에 따라 5, 4두품은 점차 법제적인 사회신분으로서의 존재감을 상실하고, 사회통념상으로 인정되는 신분은 진골과 득난, 6두품 밖에 남지 않게 되면서 골품제 자체는 형해화과정(形骸化過程)을 걷기 시작했다.

더구나 득난의 대두 이후에 귀성(貴姓)인 김씨와 박씨에게 정치적, 경제적 특권이 한층 더 집중되면서 5두품과 4두품뿐만 아니라 김과 박씨 이외의 6두품조차도 신라 왕조에 대하여 강하게 불만을 품었고, 결국 이것이 귀성(김씨와 박씨) 중심의 신라 지배체제를 와해시키는 동인(動因)의 하나로 작용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홍, 송지환, 이보슬 기자  yeu3030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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